Focus

글로벌 자본주의에 감춰진 이데올로기

2012-07-16 교육



2012 석학초청특강: 정치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세계적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 강연에 3,500명의 청중 몰려

 
지난 6월 27일 경희대학교 평화의 전당에서 열린 '2012 석학초청특강'에서 세계적인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이 "정치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What is to be done for politics)"를 주제로 강연했다. '철학계의 엘비스프레슬리'라고도 불리는 그의 명성과 대중적 인기를 말해주듯 이날 3,500여 명의 청중이 평화의 전당을 가득 메웠다. 회색 티셔츠와 남대문시장에서 1만원을 주고 구입한 검은 바지를 입고 연단에 오른 그는 편한 자세로 의자에 앉아 2시간여 동안 거침없고 열정적인 강연을 들려줬다.

이데올로기가 우리에게 거짓을 말하는 이유

슬라보예 지젝은 1930년대 할리우드 코미디영화의 한 장면을 소개하며 강연을 시작했다. 카페에서 손님이 '크림 없는 커피'를 주문하자 웨이터는 크림이 다 떨어지고 우유만 있다면서 '우유 없는 커피'를 내놓는다. 크림이 없는 커피이건 우유가 없는 커피이건, 그 두 잔의 커피는 다른 것을 첨가하지 않은 '같은 커피'다. 그러나 지젝은 "물리적으로 같은 커피지만 둘은 같지 않다"면서 정체성의 문제를 제기한다. '~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즉 부정(否定)이 정체성의 일부를 형성한다는 일종의 역설(paradox)이다.

그의 역설은 또 다른 코미디영화로 확장된다. 데이트를 마친 소녀가 집 앞까지 바래다준 소년에게 들어가서 커피를 한 잔 하자고 제안한다. 소년이 자기는 커피를 안 마신다고 거절한다. 그러자 소녀도 사실은 집에 커피가 없다고 대답한다. 커피를 구실로 한 이 '에로틱한 초청'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부정의 부정, '이중부정'이 일어났다.

나는 커피 안 마셔. 나도 커피 없어. 이 같은 말장난에서 슬라보예 지젝은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방식을 읽어낸다. "오늘날의 이데올로기는 어떤 것이 '사실이다, 아니다'라고 직접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함축적으로 거짓을 말한다. 이데올로기가 거짓을 말하는 이유는 우리에게 함축적인 의미를 주면서 정반대의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서다." 커피의 비유를 들면, '우유 없는 커피'를 주고 있다고 말을 하지만 결국은 '크림 없는 커피'를 주고 있는 것이다.

글로벌 자본주의의 총체적 실체
슬라보예 지젝은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는 메시지에 주목해야 한다"면서 "이런 식의 이데올로기에 대항하려면 각각의 함축적 의미를 잘 살펴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 이유는 총체성(totality)을 파악하기 위해서다. 그에 따르면 '헤겔의 총체성은 자기모순적이고 대립적이며 비일관적인 개념'이다. '어떤 현상을 총체적으로 파악한다'는 것은 '그 현상과 관련된 모든 징후와 대립, 비일관성까지도 통합된 일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날 강연에서 지젝은 "글로벌 자본주의의 총체성을 파악하려면 '자본주의가 이상적으로 좋은 시스템이다'라고 묘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자본주의가 실패하는 지점까지도, 국내외적으로, 총체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 사례 중 하나로 그가 거론한 기업이 '애플'이다. 애플은 포스트모던 디지털 기술로 글로벌 자본주의의 성공을 이뤘다고 칭송된다. 그러나 애플 뒤에는 폭스콘(Foxconn)이 있다.

폭스콘은 '대만의 삼성'으로 불리는 기업으로, 아이폰을 하청 생산한다. 폭스콘의 중국내 생산공장은 노동자의 자살로 악명이 높다. 지젝은 폭스콘의 모기업인 홍하이그룹 궈타이밍 회장의 최근 발언을 들려줬다. 궈타이밍은 "100만 마리의 동물을 관리해야 하니 골치가 아프다. 그래서 동물원에 가서 어떻게 하면 동물들을 잘 관리할 수 있는지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 여기서 '동물'은 자기를 위해 일하는 노동자다. 실제로 그는 사내 고위간부 회의에 타이베이동물원 원장을 강연자로 초청했다.

또 다른 예로, 지젝은 아프리카 콩고공화국 사례를 들었다. "콩고는 굉장히 많은 자연자본과 광물을 갖고 있지만 국가 자체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다. 광물을 둘러싸고 국지적인 전투가 일어나고 있다. 상당히 많은 수의 어린이들이 군사훈련을 받고 전쟁터로 내보내진다. 끔찍한 상황이다." 지젝에 따르면, 글로벌 자본주의는 단지 성공한 국가들만이 아니라, 콩고처럼 실패한 국가까지도 포함된 개념이다. "변증법에서는 이러한 실패들이 단지 운이 없어서 나타난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그 안에 내재된 것으로 파악한다. 실수와 대립, 그리고 끔찍한 파생물까지도 보편적인 개념에 포함되는 것이다."

지젝이 또 한 가지 주목하는 현상은 실업의 증가다. 일시적 실업 상태에 있는 사람만이 아니라, 더 이상 고용이 가능하지 않은 사람들, 그리고 영구적으로 실직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있다. 소말리아와 콩고처럼 나라 전체, 또는 한 국가 내의 특정 지역 전체가 실업 상태에 놓이는 경우도 있다. 최근 들어서는 '애초부터 취업이 불가능한' 계층도 생겨나고 있다. 지젝은 "유럽의 경우, 수백만 명의 대학생이 교육을 받고 나서 갑자기 깨닫게 되는 것은 자신들에게 취업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으리라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는 "오늘날 글로벌 자본주의는 실직을 창출해내고 있다"고 비판했다.



자본주의체제 강화하는 자본주의 비판

슬라보예 지젝은 자본주의가 분명한 한계를 드러내고 있음에도 왜 그 같은 현상을 명확하게 예측하지 못하고 있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그 이유 중 하나로, 그는 "반자본주의가 만연해 있는 상황에서 자본주의를 반대하기가 너무나 쉽다"는 점을 들었다. "자본가는 탐욕스럽다는 식의 언론보도에 싫증이 난다"면서 "자본주의의 비도덕성을 비판하며 그들의 탐욕과 부패를 탓하는 것은 중요한 분석을 하지 못하도록 만든다"고 경고했다. 그가 말한 '중요한 분석'은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에 대한 분석이다.

지젝은 "오늘날 거의 모든 사람들,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까지도 '자유민주주의만이 제대로 기능을 할 수 있는 체제'라고 인정하면서 그것을'어떻게 더 효율적으로 만들 수 있을지에 대해서만 고민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모든 권력자는 사람들이 또 다른 시스템, 또 다른 대안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두려워한다"고 말했다.

이데올로기라는 이름의 현대판 미신
이런 상황에서 이데올로기가 우리의 일상에 어떻게 침투하고 있는지에 대해 그는 특유의 '시니컬한 주장'을 펼쳤다. 자선활동이나 유기농식품 구매 같은 일상적 행위도 어떤 의미에서는 '자본주의 체제의 이데올로기'라고 말했다.

유기농사과는 보통의 사과보다 더 볼품이 없는데도 중산층 소비자들은 더 비싼 돈을 지불하고 그것을 산다. '내가 유기농사과를 구입했으니 나는 지구환경 보호에 기여하는 것이다'라는 식의 이데올로기가 작용해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이다. 자선활동이나 쓰레기 재활용도 마찬가지다. "쓰레기 분리수거가 지구환경을 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생산에서부터 변화가 필요한 것이다."

이 같은 행위의 미덕을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슬라보예 지젝은 "생활방식 자체를 크게 바꿀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것은 '간편한 출구'나 다름없으며, 글로벌 자본주의 시대의 미신(迷信, superstition)과 흡사하다"고 그는 말했다.

한국 방문 기간에 묵고 있는 호텔의 엘리베이터 예를 들며 그는 미신에 홀린 듯한 이데올로기의 작동 방식을 설명했다. "그 호텔은 13층이 없고 12층에서 바로 14층으로 넘어갔다. 누구를 속이려고 하는 것인가. 사실은 13층이라는 것을 신은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게임에 휘말리는 것이다. 오늘날의 이데올로기는 이런 식으로 작동한다. 사람들은 실제로는 믿지 않으면서도 믿는 듯이 행동한다."

이 같은 믿음의 구조, 신념의 구조는 자본시장의 메케니즘과도 연결된다. 지젝은 "주식시장에서 선물거래를 할 때 2~3년 후 사람들이 어떤 투자를 할 것인지, 경제 상황이 어떻게 변할 것인지, 어떤 믿음을 가질 것인가를 미리 점쳐봐야 한다"면서 "여기서 오늘날의 글로벌 자본주의의 취약성을 엿볼 수 있다"고 말한다.



"좌파는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비판
"오늘날의 자본주의 시스템은 거의 붕괴 직전에 있다"는 것이 슬라보예 지젝의 생각이다. 그는 "지난 2~3년 동안 그 '징후'를 목격했으며, 월스트리트 점령 시위(Occupy Wall Street)는 현재의 시스템이 거의 극한점까지 왔다는 것을 인식한 결과"라고 말했다. 이 지점에서 그는 좌파를 향해 "끔찍하게, 무차별적으로, 솔직해져야 한다"고 비판을 가했다.

199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발생하기 전까지 서구권에서 자본주의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상당한 번영을 안겨줬다. 당시 마르크스주의자들, 또는 그런 성향의 지식인들은 '이것은 허구일 뿐이다, 위기가 일어나면 모든 것은 무너질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붕괴를 기다렸다. "그런데 정작 서유럽과 미국, 그리스에서도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기 시작했을 때 좌파는 아무 곳에서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사람들을 단합시켜 이와 같은 시위와 운동을 하나의 큰 제안으로 이끌기를 바랐지만, 좌파 쪽에서 나온 대안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다"고 그는 말했다.

유토피아적 사회 변화는 불가능한가
슬라보예 지젝은 현대 문명과 글로벌 자본주의가 퍼트리고 있는 이데올로기의 총체적 모순을 지적했다. 오늘날 과학기술은 유전공학에 의해 인간이 '불멸의 존재'까지도 될 수 있다며 "기술적으로 모든 것이 가능한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고 선전한다. 그런 한편으로 "사회 변화, 즉 유토피아적 세계의 도래는 불가능하다"는 이데올로기가 만연해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다"면서 "인간 개인에게 고유하고 자유로운 사고영역의 벽이 무너질 경우 엄청난 도전이 다가올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데올로기는 거짓이 아니지만 오늘날 이데올로기는 거짓된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다"고 지적한 그는 헤도니즘(hedonism), 즉 쾌락주의와 관련된 최근의 몇 가지 경험을 소개했다. 그는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남녀 간의 섹스에서 어떤 체위가 근육을 더 강화할 수 있기 때문에 건강에 좋다는 등의 '굉장히 우울한' 잡지 기사를 읽었다. 007 영화 최신작 <퀀텀 오브 솔루션>에서는 제임스 본드와 본드걸의 베드신이 사라진 것을 보았다. 서유럽 중매회사들은 "사랑에 퐁당 빠지다"라는 아름다운 말을 의도적으로 배제한 채 "사랑에 빠지지 않고서도 결혼에 성공할 수 있다"는 '끔찍한' 광고 문구를 사용하고 있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그는 "다른 사람과 얽히는 것, 인간의 교류를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사랑의 교감, 진지하고 진정한 만남, 열정이 사라진 같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믿지 않으면서도 믿는 것처럼 행세하는 신념의 구조(이데올로기)가 소비와 생산, 교역 등 글로벌 자본주의 경제의 핵심에 놓여 있다고 그는 말했다.

"문제 해결을 위한 급진적 사고가 필요하다"
"우리가 직면해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급진적 사고가 필요하다"고 강조한 그의 강연은 대학의 중요성에 대한 성찰로 끝을 맺었다. 대학의 역할과 관련, 그는 전문가와 지식인의 구별이 분명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전문가는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다. 그와 달리, 지식인은 "단순히 남이 규정한 문제를 해결할 뿐만 아니라, 문제 자체를 하나의 법칙으로 규명하고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을 정립하는 사람"이다.

전문가를 배출해달라는 사회의 요구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대학의 사명은 지식인을 양성하는 데 있다고 그는 말했다. "사고의 흐름을 막아서는 안 된다. 물론 현재의 상황이 절박하지만, 바로 그런 상황이 현실이기 때문에 우리는 한걸음 물러서서 사고를 해야 한다. 대학은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존재다."

석학 초청 특강은 학계와 지성사를 선도하는 세계적인 석학을 초대해, 나라와 인류 사회의 더 큰 미래를 모색하는 '성찰과 창조'의 장으로 2011년에는 한국 현대사 분야의 세계적 석학 이정식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 명예교수(정치학)를 초청하여 '21세기에 다시 보는 해방후사'를 개최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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