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뉴스
왜 국가를 위해 죽어야 하나

왜 국가를 위해 죽어야 하나
-전쟁 없는 세상을 위해
어떻게 저항할 것인가-
강희원 지음 | 152×225 | 280쪽 | 무선 | 19,000원
2025년 10월 10일 | ISBN 978-89-8222-810-0 (03300)
법철학자 강희원 교수의 신간 《왜 국가를 위해 죽어야 하나》(부제: 전쟁 없는 세상을 위해 어떻게 저항할 것인가)가 출간됐다. 이 책은 ‘nation’, ‘state’에 대한 언어학적 설명과 함께 고대의 영웅 숭배부터 중세의 성전(聖戰), 근대의 국가철학과 내셔널리즘을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전쟁에서 목숨을 바치라는 ‘순국’을 합리화해 온 담론을 추적한다.
저자는 특히 우리나라에서 국가와 민족의 이름으로 강요되는 순국의 의무가 강제된 역사적 · 철학적 맥락을 탐색하며 우리가 당연시하던 민족과 국가라는 가치들에 의문을 제기한다. 이를 통해 민족은 만들어진 신화이고, 평화를 위한 전쟁은 거짓말에 불과하며, 국가가 강요하는 죽음은 신성한 제의가 아니라 강제된 폭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걸 분명히 한다. 저자는 평화를 이루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전쟁이 아니라 비폭력을 선택할 용기임을 강조한다.
《왜 국가를 위해 죽어야 하나》는 법철학과 정치철학, 사회이론에 관심 있는 인문 교양 독자를 비롯해 평화와 인권에 관심 있는 독자, 전쟁 없는 세상을 꿈꾸고 삶의 평화를 설계하는 모든 이들을 위한 필독서이다.
#국가 #민족 #전쟁 #순국 #평화 #비폭력 #반전(反戰) #민족주의비판
출판사 리뷰
어떻게 하면 평화로운 세상이 이루어질 수 있는가?
국가와 민족의 이름으로 강요되는
‘순국’을 비판적으로 고찰한 국내 최초의 책
평화를 이루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전쟁이 아니라 비폭력을 선택할 용기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뿐만 아니라 전 세계 곳곳에서 군사적 충돌이 벌어지고 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전쟁은 곧 끝날 것 같지만, 그렇다고 두 국가 사이에 일촉즉발의 상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런 전쟁은 먼 이야기가 아니다.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은 우리나라는 남과 북이 반세기 넘게 극한의 대치를 이어가고 있다. 병역의무가 있는 이 땅에서는 젊은이들에게 어떻게 하면 적을 많이 죽일 수 있는지 연구하고 훈련하게 한다. 전쟁이 아니더라도 많은 이들이 군대 내 사고로 목숨을 잃는다. 우리나라는 대량살상무기를 생산하고 수출하기까지 한다.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은 왜 사라지지 않는 것일까? 자신과 국가를 방어하기 위하여 적군의 생명을 파괴하는 일을 평화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정당화할 수 있을까?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에게 군대를 거부하고 국가를 위하여 죽지 않을 자유가 있는가? 순국자들을 추모하고 영웅시하는 일은 국가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라고 강요하는 것과 같은데,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전쟁은 인간의 본성인가? 인간의 집단적 질병인가? 국가권력자의 놀이인가? 평화는 인간의 본성에 반하는 것인가? 반인간적 욕구인가? 인간사회에서 평화란 전쟁과 전쟁 사이에 신기루와 같이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기망(欺妄)의 현상인가? (22쪽)
《왜 국가를 위해 죽어야 하나》는 이런 의문에서 시작한다. 인간의 역사에서 전쟁을 멈춘 적은 없다. 그래서 전쟁이 인간의 본성인 것처럼 여겨지기까지 한다. 그러나 철저한 평화주의자인 저자는 전쟁은 인간의 의무도 운명도 아니라는 걸 증명해 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민족, 국가, 전쟁, 순국 등 우리가 당연시하던 언어와 가치들을 의문을 제기하고 그 개념들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깊이 탐구한다. 저자는 국가와 민족의 이름으로 찬양하는 죽음은 강제된 국가 폭력의 이데올로기이고, 평화를 이루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절대악인 전쟁을 단호히 거부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순국’을 종교적 이데올로기로 변화시킨 크리스트교
프랑크의 왕이 전개하는 전쟁을 회피하는 자들은 공동체로서 교회 전체, 가톨릭교의 교의(敎義), 성성(聖性)과 정의(正義), 그리고 성지로서의 왕국을 적대하는 자들이라고 천명되었다. 여기에서 어용 신학자인 크리스트교 교부들은 “프랑크 왕국을 위한 전쟁”이 바로 “성지수호를 위한 성스러운 전쟁”이라고 선언하면서, 프랑크의 왕과 왕국을 위해서 죽는 것, 즉 순국을 종교적 이데올로기로 승화시켰다. (68-69쪽)
저자에 따르면 순국과 순국 찬양의 역사는 기원전부터 있었으나, 그 의미와 성격을 결정적으로 변화시킨 것은 중세 유럽인들이 믿었던 크리스트교이다. “중세에 지상의 조국 개념은 크리스트교에 의해 천상의 조국 개념으로 대체되었고, 순국의 성격도 정치적 행위가 아닌 종교적 행위로 이해되었다.” 크리스트교도들은 ‘진정한 조국’인 천상의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을 ‘성인’이라 부르며 추앙했고, 11세기 말에서 13세기 말까지 성지 팔레스티나와 예루살렘을 탈환하고자 감행한 십자군 전쟁이 처음의 의도와 달리 국왕과 조국을 방어하기 위한 명분으로 퇴색했지만, 전쟁에 참가한 “십자군 전사는 자신의 모든 죄가 사면되고, 천국으로 직행한다고 확신했다.” 크리스트교는 십자군 전쟁을 성지수호를 위한 성스러운 전쟁으로 승화시키고 이데올로기화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켰다.
대량살상과 파괴를 정당화한 이데올로기, 내셔널리즘
근대 이후 거대한 파괴와 대량살상은 내셔널리즘의 이름으로 자행되었다. 저자는 “내셔널리즘은 국가권력이 살육과 파괴라는 악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만들어 낸 이데올로기”였다고 말한다. 그 이데올로기는 국가권력의 범죄행위를 늘 정의(justice)로 포장해 왔다. 저자에 따르면 지배권력은 지방적 · 토착적 문화를 정복하거나 변형해서 획일적인 ‘국민문화’를 만들어 냈다. 내셔널리즘은 자기가 속한 네이션을 타자로부터 구별해서 의식하게 하고, 동지와 적을 나누어, ‘우리’라는 공동체 혹은 같은 영역에 속한 사람들 사이에 동질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이를 통해 국가와 민족을 위해 자기희생까지 불사하는 애정을 환기시켰고, 이는 권력자를 위한 이데올로기로 작동했다. 저자는 우리에게 그토록 애정을 가지라고 주입하는 민족이란 지배자들에 의해 주입된 민족주의라는 환상을 통해서 생겨난다고 강조한다.
부르주아지가 장악한 근대 국가는 침략과 약탈을 통해 축적된 부를 ‘자본’으로 회전시켜, 자본을 무한히 확대 재생산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했다. 자본이 더 많은 자기증식을 위해 자원과 시장을 찾는 과정에서 근대 국가는 다양한 방식의 ‘전쟁’을 수행하게 되었고, 고도로 발전한 ‘자본’의 매개 작용에 따라 국가와 국가 간의 무한경쟁에 따른 파시즘적 총력전을 수행하기도 했다.
네이션 스테이트의 응집력으로 오늘날에도 여전히 개개인은 자기 생명보다 국가의 유지를 중시하고, 손에는 총을 들고, 중무장한 탱크를 몰며, 총알과 포탄이 비 오듯이 쏟아지는 전장(戰場)으로 돌진해서 적국으로 지정된 다른 네이션 스테이트의 영토를 침공해 들어가 일말의 가책도 없이 그 터전을 파괴한다. 또한 그 구성원인 군인과 민간인들을 무차별적으로 대량 학살하고, 자신들에게 닥쳐오는 고통을 감내한다. 여기에서 ‘왜 인간은 그렇게까지 국가를 중시하는 것일까? 아니, 왜 인간이 그러한 국가를 필요로 하는가?’ 등의 근본적인 물음들이 제기된다. (192쪽)
이 책에서는 전쟁을 미화하고 찬양한 사상가들, 예컨대 휴고 그로티우스,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 프리드리히 헤겔, 막스 셸러, 카를 슈미트 등의 전쟁 형이상학자들의 논리를 비판하기도 한다. 저자는 ‘전쟁을 통해 진보와 발전을 이룬다’, ‘전쟁의 과정을 거치면서 활력이 생겨난다’, ‘전쟁 이후에 평화와 인류의 가치가 정착된다’는 등 전쟁을 정당화하는 다양한 견해들이 있지만, 이것이 전쟁 중에 죽은 자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되묻는다.
전쟁은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애국심을 불러일으키고 국가를 지지하게 만드는 정치의 방식이다. 내셔널리즘은 국가의 지배권력자가 자기들은 아무런 희생도 치르지 않으면서 계속 민중에게 죽음을 강요하고, 민중을 지배하고 선동하기 위해 만들어 낸 정치적·사회적·심리적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저자는 우리가 애착을 갖고 있는 ‘민족공동체’란 상상이며, “역사적‧문화적 구성물로서의 ‘민족’과 민족주의 담론이 가진 허구성에 대해서 냉정하고 엄중한 분석과 성찰이” 요구된다고 강조한다. 애국주의 현상과 순국에 관해 정신분석학적으로도 접근하는 저자는 “애국주의는 평소에 국가권력이 주도면밀하게 주입하는 온갖 상징조작에 의해서 개인들이 걸려 있는 집단적 최면현상”이며 “순국이란 애국주의의 극단적 현상”이라고 분석한다.
“전쟁은 인간의 의무도 운명도 아니다.”
저자는 “좋은 전쟁 또는 나쁜 평화란 인류사에서 있었던 적이 없다.”고 말한다. “전쟁은 최대 최고의 악(惡)”일 뿐이다. 저자는 “국민의 피와 땀을 파괴하는 최악의 범죄”인 전쟁을 일으키는 주체가 바로 국가라고 비판한다. 그에 따르면, 국가는 국민에게 전쟁터에 나가 파괴와 살상을 행하라고 명령하는 존재이며, 자신의 목숨을 바치라고 강요하는 “잠재적 살상단체”이다. “군대는 그러한 국가의 잠재적인 살인 장치”일 뿐이다.
저자는 평화를 목적으로 한다고 해도 전쟁은 “범죄행위에 불과하다”고 일갈하며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고, 평화라는 목적은 평화적 수단에 의해서만 정당화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우리가 평화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반드시 포기해야 할 것이 무엇이고, 또 꼭 성취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이제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좋은 전쟁 또는 나쁜 평화란 인류사에서 지금까지 있었던 적이 없다. 피(blood)로는 피를 씻을 수 없다. 비폭력이 모든 정치적 · 도덕적 문제들의 해답이다.
전쟁이란 국가권력자들이 민족의 통일, 정의의 구현 또는 영토의 방위 등등 그럴싸한 미명하에 자행하는 범죄행위에 불과하다. 전쟁은 정치(正治)로서 정치(政治)가 아니다. 그것은 국가권력자가 자신의 영락을 위해서 국민의 피와 땀을 파괴하는 최악의 범죄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삶의 평화를 위해 단호히 전쟁 수행의 명령을 거부해야 한다. (260쪽)
저자는 국가를 위해 죽으라고 강요하고 강제하는 것은 살인의 교사이자 살인행위 자체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전쟁이라는 절대악을 강요하는 국가권력을 위해 죽기를 거부하기 위해서 우리는 늘 “깨어 있어야 한다”고, “누구나 “아니오!”라고 자유롭게 말해야 하고 그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자고 호소한다.
“전쟁은 인간의 의무도 운명도 아니다.” 평화를 향한 진정한 용기란 전장으로 나가 살육과 파괴를 서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전쟁도 단호히 거부하는 것이다. 평화를 이루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전쟁이 아니라 비폭력을 선택할 용기이다.
차례
프롤로그 이 글을 쓰게 된 이유 9
1장 인간과 국가 그리고 전쟁 19
1. 전쟁은 인간의 본성인가 21
2. 민족통일이란 구호에 대해 25
2장 근본적인 물음 31
1. 왜 국가를 위해서 죽어야 하나 33
2. 국가와 민족을 위해 죽지 않을 자유 38
3장 순국 찬양의 기원 45
1. 순국 찬양의 관습 47
2. 고대 그리스 ・ 로마 시대 순국의 의미 49
조국(patria)이라는 말 | 고대 그리스 · 로마 시대 순국자의 신격화
3. 유럽 중세시대의 전사(戰死) 54
4. 크리스트교에 의한 순국의 종교적 이데올로기화 59
4장 민족과 국가 그리고 민족국가 71
1. 언어가 만든 세계 73
헌법 언어로서 국가와 국민, 민족 | 번역어로서 민족, 국가, 민족국가
2. 국가 신화와 정치신학 89
신비체의 의미 | 국가의 이상화: 신비체로서 국가
3. 민족이라는 신화 106
민족, 상상의 공동체 | 지배권력의 부산물로서 민족 관념
4. 근대민족국가 118
근대국가의 기초로서 사회계약 | 근대국가로서 네이션 스테이트의 실체
5장 전쟁과 병역의무, 죽음과 파괴의 언설 143
1. 전쟁이란 무엇인가 145
2. 전쟁의 형이상학: 전쟁 찬양론자의 변명 151
정당한 전쟁론: 휴고 그로티우스 | 국가 주권의 절대성의 징표로서 전쟁: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 | 인륜의 보약으로서 전쟁: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 민족의식의 각성제로서 전쟁: 막스 셸러 | 정치로서 전쟁: 카를 슈미트
3. 전쟁의무로서 병역의무의 형이상학 172
4. ‘평화를 위한 전쟁’이라는 거짓말 177
6장 국민에게 죽음을 강요하는 국가 189
1. 전쟁의 시대 191
2. 죽음의 이데올로기로서 ‘내셔널리즘’ 193
주입된 이데올로기로서 내셔널리즘: 기호와 상징을 조작하는 ‘국가(권력)’ | 내셔널리즘의 주박(呪縛)
3. 국가라는 이름의 전범 210
폭력 조직으로서 국가 | 최악의 범죄자로서 국가권력, 최대 최고 악(惡)으로서 전쟁
4. 호모 사케르로서 국민: 전쟁과 국가 그리고 개인 217
전쟁의 예외상태론: 주권 절대성의 징표로서 전쟁 | 제물(祭物)로서 국민 | 강제수용소로서 국가
5. 순국자의 정신분석 242
리비도적 동일화의 욕구로서 애국 | 리비도적 동일화의 극단으로서 순국
에필로그: 전쟁 없는 세상을 위해 어떻게 저항할 것인가 260
저자 후기 270
참고 문헌 275
지은이
강희원
경희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동 대학원을 수료한 뒤 제24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변호사로 활동하였다. 이후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교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경희대학교 법과대학 및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 30여 년간 재직하며 법철학, 법사회학, 민사소송법, 노동법, 법조윤리를 강의하였다. 현재는 경희대학교 명예교수로 있다.
저자는 법의 문제를 인간, 국가, 사회, 종교, 정치, 언어 등과의 관계 속에서 탐구해 왔다. ‘법과 인간(법-인간)’, ‘법과 정치(법-정치)’, ‘법과 사회(법-사회)’, ‘법과 종교(법-종교)’, ‘법과 언어(법-언어)’와 같이 접속조사나 하이픈을 통해 법을 다양한 인문·사회적 맥락과 연결하는 ‘사이학(間學, betweenscience, Zwischenswissenschaft)’ 또는 ‘사회철학(間哲學, betweenphilosophy, Zwischensphilosophie)’을 추구해 왔다.
『노동법의 새로운 모색』, 『노동법 기초이론』, 『법철학 강의』 등의 저서를 집필했으며, R. C. 크반트의 『노동철학』과 니클라스 루만의 『법사회학』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또한 「한국의 법문화와 샤머니즘」, 「독일적 법사유와 한국법학의 반성」, 「역할법으로서 노동법」, 「태초의 노동계약 — 성경의 노동약정」, 「법과 폭력」, 「법의 녹색화와 녹색법학」, 「법에 대한 기호학적 접근」 등 120여 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책 속으로
‘민족(民族, nation)’은 우리 실정헌법의 언어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헌법학이나 공법학의 논의 주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 민족은 거의 논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이는 법의 뿌리에까지 접근하는 법철학에서조차 마찬가지였다.
-15쪽
이 책에서는 전시(戰時)에 인간으로서 국민이 ‘조국을 위해서 죽는다는 것(Pro Patria Mori)’, 즉 ‘순국’이 어떻게 강제되었고 또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나 하는 문제에 대해서만 역사적 · 철학적 측면에서 깊게 성찰해 보고자 한다.
-16쪽
전쟁은 인간의 본성인가? 인간의 집단적 질병인가? 국가권력자의 놀이인가? 평화는 인간의 본성에 반하는 것인가? 반인간적 욕구인가? 인간사회에서 평화란 전쟁과 전쟁 사이에 신기루와 같이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기망(欺妄)의 현상인가?
-22쪽
우리는 여기에서 근원적인 질문에 봉착한다. 왜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죽어야 하는가? 도대체 ‘국가’란 무엇이고 ‘민족’이란 무엇인가? ‘민족’은 반드시 ‘국가’를 가져야 하는가? ‘민족’과 ‘국가’ 없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길은 없는가?
-35쪽
한반도의 남쪽과 북쪽에 사는 사람들에게 ‘한(韓)’이라는 ‘민족’은 지배권력이 만들어 낸 역사적 · 문화적 구성물이 아니라, 마치 신화 속에만 존재하던 군주인 단군이 실제로 자식을 낳아 그 후손이 퍼져 형성된 ‘원초적인 혈연공동체’인 것처럼 각인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상상 속의 ‘민족공동체’라는 관념에, 그것이 마치 본능의 일부인 것처럼 애착을 갖게 되는 것 같다. 그러나 이제 역사적 · 문화적 구성물로서의 ‘민족’과 민족주의 담론이 가진 허구성에 대해서 냉정하고 엄중한 분석과 성찰이 우리에게 요구되고 있다. 그러한 언설(言說)과 담론 혹은 신념은 누구를 위해서, 누구에 의해서 조작되었는가? 그것은 지배집단에 의해 주입된 정치적 · 문화적 마약(narcotics)이 아닌가?
-42쪽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시민이 공동체를 위해서 전사하면 그 사자(死者)를 신격화했지만, 시민이 ‘조국을 위해서’ 죽는 것 자체는 시민계급의 자기 이익을 위한 것이었다. 약간 중립적으로 말한다면, 누구라도 자신의 조국을 위해서 죽을 수 있도록 종교적 방향(芳香)과 의미에서 전사(戰死) 자체를 본격적으로 신성(神聖)으로 승화시켰던 것은 아닌 것 같다. 물론 그 후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시민적 사고(思考)가 여러 면에서 중세 유럽 사상의 형성에 많은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다.
-54쪽
중세 유럽 사람들이 품고 있던 순국(殉國)의 의미와 성격을 결정적으로 변화시켰던 것은 크리스트교였다.
-59쪽
프랑크의 왕이 전개하는 전쟁을 회피하는 자들은 공동체로서 교회 전체, 가톨릭교의 교의(敎義), 성성(聖性)과 정의(正義), 그리고 성지로서의 왕국을 적대하는 자들이라고 천명되었다. 여기에서 어용 신학자인 크리스트교 교부들은 “프랑크 왕국을 위한 전쟁”이 바로 “성지수호를 위한 성스러운 전쟁”이라고 선언하면서, 프랑크의 왕과 왕국을 위해서 죽는 것, 즉 순국을 종교적 이데올로기로 승화시켰다.
-68-69쪽
근대 이후 거대한 파괴와 대량의 살육이라는 무서운 악(惡)의 소굴이 내셔널리즘이다. 내셔널리즘은 국가권력이 살육과 파괴라는 악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만들어 낸 이데올로기다. 그 이데올로기는 국가권력의 범죄행위를 늘 정의(justice)로 포장한다.
-72쪽
근대 이후 서유럽에서 국가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전쟁과 살육의 역사를 보면, 국가란 인간들의 사회적 본능의 일부로서 투쟁의 본능에 입각한 제도가 아닌가 싶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의 사회성이란 국가 권력이 내세우는 이상이나 이념과는 완전히 몰(沒)교섭적으로 작용하고, 발전하여 완성되어 가는 성질의 것이다. 국가라는 제도는 그러한 투쟁본능을 강제적으로 조직하는 힘의 발전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89쪽
중세 유럽에서는 ‘신비체(神祕體, Mysterium: a mysterious body)’가 피지배민, 즉 백성의 ‘도덕적 정치체’와 동일시되고, 그 후 국가와 동일화되었다. 그 결과 국가는 오늘날 법인격(法人格, legal person)이 인정되고 있는 주식회사 등 각종의 회사(會社) 등과 같은 법인(法人, corporate body)과 유사한 관념적인 신비체가 되고 그것을 위한 죽음은 신성한 고귀성(高貴性)을 가지게 되었다. 그 결과 조국을 위한 죽음은 이제 종교적인 관점에서 생각되기 시작했다. 즉 그것은 교회의 ‘신비체’와 같이 현실성을 가진 국가의 ‘신비체’를 위한 희생으로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는 바로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확실하게 존재했지만, 중세 초기에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던, 세속국가에 대한 윤리적 가치나 도덕적 감정의 회복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은 ‘조국을 위해서 죽는다’라는 관념이 크리스트교로부터 이교화(異敎化) 및 이단화(異端化)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크리스트교적 차원으로 승화되었다는 의미다.
-101-102쪽
역사적으로 보면, ‘네이션’의 문제는 결코 새롭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절실한 현실적인 문제로서 거론되고 있다. 무엇보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민족문제’와 ‘민족운동’은 19세기 이래 20세기의 제국주의 시대를 관통해서 그 심각성을 더해갔다. ‘파시즘’으로 불리는 ‘극단적인 민족주의’의 경험도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니다. 최근에 ‘민족’의 문제가 새로이 적극적인 의미로 제기되고 있는 것은 현 단계의 세계사에서 ‘평화’가 매우 중요한 화두가 되어온 수년간의 사정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106쪽
유럽에서 네이션 스테이트의 형성과정은 유럽 자본주의의 발달과정과 일치한다. 서유럽에서 시작된 내셔널리즘이라는 이데올로기는 그것에 기초한 서유럽의 네이션 스테이트 내부에서 자본주의 발전과 함께 제국주의로 전개되었다. 근대 자본주의를 바탕으로 한 국내 시장 형성의 요구는 네이션 스테이트의 토대가 되었다. 국내 자본주의 시장이 형성되려면 국가 구성원의 모든 계급을 신분적인 제한에서 해방하고, 자유롭고 평등한 형식이 필요했다. 과거의 신분세습을 타파하기 위해서 민주주의적 권리를 주장할 필요가 있었다. 그 때문에 봉건주의와 절대주의를 타파하기 위한 민주주의 혁명이 일어나게 된다. 네이션 스테이트는 이러한 혁명의 결과로 생긴다.
-126쪽
전쟁은 우리의 마음을 쥐어짜고 기쁘게 하거나 슬프게 한다. 우리는 출정자를 격려해 전장으로 보내고, 전사자의 공을 기리며, 개선자를 기쁘게 맞이한다. 이는 전쟁이 단순한 자연적 사실을 넘어 사회적 · 정치적 의의를 지니고, 우리의 정신에 울림을 주는 사건임을 의미한다. 그러한 전쟁의 의의나 정신에 대해 과학은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
-150쪽
현재 인류는 사용하는 사람의 의도에 따라 우리말 ‘민족국가’ 또는 ‘국민국가’로 번역되는 ‘네이션 스테이트’의 시대에 살고 있다. 전 인류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인간들은 ‘네이션 스테이트’라는 테두리 안에서 상당한 물질적 번영을 이룩하고 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네이션 스테이트들은 그 테두리 밖에서는 ‘전쟁기계’로서 서로 각축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네이션 스테이트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근현대, 특히 20세기 이후는 그야말로 대규모 전쟁의 시대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191쪽
네이션 스테이트의 응집력으로 오늘날에도 여전히 개개인은 자기 생명보다 국가의 유지를 중시하고, 손에는 총을 들고, 중무장한 탱크를 몰며, 총알과 포탄이 비 오듯이 쏟아지는 전장(戰場)으로 돌진해서 적국으로 지정된 다른 네이션 스테이트의 영토를 침공해 들어가 일말의 가책도 없이 그 터전을 파괴한다. 또한 그 구성원인 군인과 민간인들을 무차별적으로 대량 학살하고, 자신들에게 닥쳐오는 고통을 감내한다. 여기에서 ‘왜 인간은 그렇게까지 국가를 중시하는 것일까? 아니, 왜 인간이 그러한 국가를 필요로 하는가?’ 등의 근본적인 물음들이 제기된다.
-192쪽
전쟁이란 국가권력 집단 간 정치권력의 쟁탈전일 뿐이다. 그들은 최악의 범죄자들이다. 권력자들은 자신들이 보기 싫은 놈을 배제하고 더 큰 정치권력을 얻고 싶은 욕망에서, 더 많은 사람을 지배하기 위해서 전쟁을 시작한다. 정치권력을 손아귀에 넣기 위해 정치인들은 온갖 수단을 동원해 전쟁을 정당화하려 한다. 일단 전쟁이 시작되면, 분쟁국의 군인들은 상대국 국민을 죽이고, 이들 가족은 갈라져 서로 교류할 수 없게 된다. 그들과 교류하는 자는 반역 또는 반국가세력으로 낙인찍힌다.
-216쪽
우리가 평화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반드시 포기해야 할 것이 무엇이고, 또 꼭 성취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이제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좋은 전쟁 또는 나쁜 평화란 인류사에서 지금까지 있었던 적이 없다. 피(blood)로는 피를 씻을 수 없다. 비폭력이 모든 정치적 · 도덕적 문제들의 해답이다.
전쟁이란 국가권력자들이 민족의 통일, 정의의 구현 또는 영토의 방위 등등 그럴싸한 미명하에 자행하는 범죄행위에 불과하다. 전쟁은 정치(正治)로서 정치(政治)가 아니다. 그것은 국가권력자가 자신의 영락을 위해서 국민의 피와 땀을 파괴하는 최악의 범죄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삶의 평화를 위해 단호히 전쟁 수행의 명령을 거부해야 한다.
-26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