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cus(old)
디 엘더스(The Elders)에 미원평화상 첫 영예
2024-12-19 교류/실천

제1회 미원평화상 시상식, 더 나은 미래를 향한 희망의 가능성 모색
조인원 이사장 “전환의 파고 헤쳐갈 길, 세계 시민의 새로운 시선과 의식에 있다”
반기문 디 엘더스 공동 부의장, 실존적 위협 해결 위한 포용·협력·연대 촉구
제1회 미원평화상 시상식이 지난 11월 29일(금) 평화의 전당에서 열렸다. 경희학원은 지구사회가 자유롭고 평화롭게 살아갈 ‘문화세계의 창조’를 필생의 과업으로 삼았던 설립자 미원(美源) 조영식 박사의 공적을 기리면서 지속 가능한 평화의 의미를 되새기고, 전 지구적 협력을 촉진하기 위해 미원평화상(Miwon Peace Prize)을 제정했다. 첫 수상의 영예는 세계 평화와 인권 증진을 목표로 세계 지도자들이 참여하고 있는 ‘디 엘더스(The Elders)’에 돌아갔다.
디 엘더스는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이 2007년 설립했다. 전직 국가 원수, 정부 수반, 유엔 사무총장,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디 엘더스는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아가며, 서로의 보편적 인간성과 지구, 그리고 미래 세대에 대한 공동 책임을 인식하는 세상’, ‘모든 인권이 보편적으로 존중받고, 빈곤이 사라지며, 사람들이 두려움과 억압에서 벗어나 자신의 진정한 잠재력을 실현할 수 있는 세상’을 비전으로 글로벌 문제 해결과 인권 증진, 평화 촉진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미래 세대의 희망 위해 더 넓은 지혜, 더 큰 용기, 더 나은 인간의 문화세계 함께 열어가자”
시상식은 △미원평화상 경과보고 △수상자(기관) 소개 △기념사 △시상 △수락사 △기념 대담 순으로 이어졌다. 행사는 웹캐스트를 통해 생중계했다. 조인원 경희학원 이사장, 이리나 보코바(Irina Georgieva Bokova) 미원평화상 선정위원회 위원장(제10대 유네스코 사무총장, 경희대학교 미원석좌교수), 미원평화상 후원재단의 노상석 이사장과 임원, 미원평화상 본상 조각상인 ‘평화의 지구’를 제작한 박은선(미술대학 83학번 동문) 작가 등이 시상식에 참석했다. 디 엘더스의 반기문 공동 부의장(제8대 유엔 사무총장)은 현장에 참석했고, 메리 로빈슨(Mary Robinson) 전 의장(제7대 아일랜드 대통령)과 회원들은 웹캐스트로 시상식을 지켜봤다.
미원평화상 수상자(기관)는 국내외 학술기관과 시민단체로 구성된 추천위원회의 후보자 추천, 세계 석학과 실천가로 구성된 선정위원회의 논의 후, 경희학원 이사회의 승인을 통해 선정했다. 미원평화상 선정위원회는 디 엘더스의 분쟁 해결을 위한 변함없는 헌신, 세계적인 도전과제 해결을 위한 용기, 세계 평화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해 만장일치로 미원평화상 첫 수상자(기관)를 선정했다.
조인원 이사장의 기념사에서도 디 엘더스를 수상기관으로 선정한 이유가 드러난다. 조 이사장은 ‘전환의 시대, 행성 의식의 미래’라는 제목의 기념사를 통해 “디 엘더스는 인권과 취약 계층, 기후 변화와 공공보건, 폭력적 갈등과 핵 확산, 파괴적 과학기술의 위협 등 이 시대 지구사회 난제를 헤쳐가기 위해 남다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관계와 연결, 상호 존중을 중시하는 인간 내면의 성찰, 시련과 좌절의 순간을 맞아 용기를 잃지 않는 불굴의 실천 의지가 디 엘더스의 숭고한 노력에 살아 숨 쉰다. 디 엘더스의 숭고한 노력에 깊은 사의를 전한다. 미래 세대의 희망을 위해 더 넓은 지혜, 더 큰 용기, 더 나은 인간의 문화세계를 함께 열어갔으면 한다”라고 말했다.
▶ 기념사 ‘전환의 시대, 행성 의식의 미래’ 전문 보기
디 엘더스를 대표해 ‘디 엘더스의 지구 평화 여정(The Elders’ Journey for Planetary Peace)’이라는 제목으로 수락사를 전한 반기문 부의장은 “기관으로서 처음 받는 상이라 의미가 남다르다. 디 엘더스의 비전과 사명이 미원의 철학과 깊이 연결돼 있기에 한국인으로서 큰 자부심을 느낀다. 미원은 이념과 체제를 넘어서는 세계를 꿈꿨다. 인간 존엄성과 보편적 가치에 기반한 글로벌 거버넌스의 새 지평을 모색했다. 넬슨 만델라는 인류 보편 가치를 위해 헌신적으로 투쟁했다. 그가 보여준 연대 의식과 인류애는 국가의 경계를 초월한 것이었다. 평등과 정의에 대한 그의 믿음은 디 엘더스를 창립하기에 이르렀다. 미원평화상을 계기로 양 기관의 설립 정신과 설립자들의 메시지가 전 세계 더 많은 사람에게 전달될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 수락사 ‘디 엘더스의 지구 평화 여정’ 전문 보기
메리 로빈슨 전 의장은 “미원평화상은 디 엘더스의 비전과 사명을 지지하고, 더 열심히 활동하라는 격려라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 세계에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필요하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변화를 요청한다. 디 엘더스는 연대와 협력을 통해 더 나은 미래를 열어나가는 데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수상 소감을 전했다.
디 엘더스에는 본상 ‘평화의 지구’ 조각상과 부상 ‘세계평화 후원금’을 수여했다. 조각상은 지구 행성의 일곱 대륙을 상징하는 일곱 개 구(球)가 평화를 의미하는 월계수 잎과 함께 하나로 연결돼 평화의 지구를 표상한다. 후원금은 재미 경희대 동문이 구성한 미원평화상 후원재단의 성금으로 마련했다.

경희와 디 엘더스, 인간의 가치와 양심이 살아 숨 쉬는 더 나은 미래 염원
이날 시상식은 단순한 시상을 넘어 경희와 디 엘더스의 비전과 가치를 공유하면서 지속 가능한 미래를 향한 희망의 가능성을 모색한 자리였다. 경희와 디 엘더스가 걸어온 길은 서로 다르지만, 지향하는 방향은 같다. 인간의 가치와 양심이 살아 숨 쉬는 더 나은 미래를 염원한다.
평화의 전당에 새겨진 “인간에겐 사랑을 인류에겐 평화를”이라는 문구는 시대를 넘어 경희가 추구해야 할 인간의 영원한 가치, 그 가치의 지향을 상징한다. 이 문구의 역사적 배경은 7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경희는 한국전쟁의 포화와 총성에서 이념과 국경의 경계를 넘어서는 인류 보편의 가치, 인간이 인간답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문화세계를 꿈꿨다. 이를 통해 “학문과 평화”의 전통을 쌓아 올리자는 것이 경희의 설립 정신이다. 지난 세월 경희는 더 나은 인간의 미래를 위한 역사의 향로를 만들어 왔다.
전쟁으로 황폐해진 나라의 번영을 위한 농촌운동과 잘살기 운동. 파괴된 자연을 복원하는 수림 조성 운동. 국제 사회의 인류 보편 가치 구현을 도모하는 대외 활동. 국내외 시민사회와의 연계·협력을 모색한 세계 시민사회 활동. 경희의 그런 노력에는 인간과 사회, 자연과 문명의 우주적 맥락을 조망하는 전일사관(全一事觀)이 있었다. ‘세상에 홀로 있는 것은 없다’, ‘세상의 모든 것은 서로 연결돼 있다’, ‘상관상제(相關相制), 상관상승(相關上乘)의 전일적 우주에서 역사는 창성과 변화의 현묘한 조화를 거듭한다’는 사유의 지평이 경희의 길을 열어 왔다.
만델라는 1942년 인종차별 정책 아파르트헤이트에 저항했다. 27년간의 투옥 생활, 그리고 영면에 드는 순간까지 자유와 진실을 향한 용기와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그가 디 엘더스를 창립한 나이도 89세였다. 만델라는 2007년 요하네스버그에서 열린 디 엘더스의 첫 번째 공식 회의에서 비전을 공표했다. “디 엘더스의 힘은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권력이 아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의 독립성과 도덕적 진실성에서 나온다. 디 엘더스는 두려움이 있는 곳에 용기를 불어넣고, 갈등이 있는 곳에 화합을 이끌어내며,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말했다.
디 엘더스는 이러한 비전을 이어받아 세계 지도자, 시민사회와 협력해 실존적 위협에 대응하고 있다. 분쟁이 발생할 때마다 신변의 위협을 무릅쓰고 현장을 직접 찾아 갈등을 완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국제 사회가 직면한 도전과제에 대한 지구적 해법 도출을 위해 필요할 때마다 현재의 권력에 진실과 지혜를 담은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았으며, 소외된 지역과 계층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특히, 미래 세대가 더 나은 세상에 대한 희망과 노력의 여정을 계속해 나가도록 영감을 불어넣어 주고 있다.

“전일적으로 성찰하는 지구 행성 의식이 살아 숨 쉴 때, 새 활로 열 수 있다”
그러나 경희와 디 엘더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금, 이례적이고 절박한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 전례 없던 팬데믹 상황에서 인류는 각자도생의 생존 논리에 갇혀 스스로 단절과 고립을 택했다. 그 선택이 갈등과 분열을 키웠다. 지정학적 충돌이 심화하면서 핵무기 사용 불사 발언도 들려온다. 핵전쟁의 가능성이 역사상 최고조에 달했다. 우리 삶의 방식이 지금의 위기를 불러왔다는 진단과 지구 생명체가 공멸할 수 있다는 전망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우리가 마주한 현실은 그간 당연시했던 ‘모든 것’에 관한 깊은 성찰과 함께 지구 행성 모든 존재의 상생과 공영, 새로운 평화의 길을 찾아 나설 것을 요구하고 있다. 조인원 이사장과 반기문 부의장은 기념사와 수락사를 통해 긴박한 현실을 헤쳐가기 위한 성찰적 전환 의식이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조 이사장은 “우리가 마주한 전환의 실체는 두 얼굴을 하고 있다. 인류사회는 지금 그 어느 때와도 비교할 수 없는 풍요의 시대를 경험하고 있다. 그러나 그 이면엔 지구사회 안위에 관한 실존적 심려가 전례 없이 두드러지고 있다. 지구사회 불균형이 심화하면서 정치·사회적 혼돈과 국제정세 불안이 가중되고 있다. 지구 행성 거의 모든 곳에서 불안의 기류가 예사롭지 않다. 그간 국제 사회는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럼에도 지구사회 취약 지역, 취약한 이들을 위한 지원과 대응은 기대에 크게 못 미친다”면서 “지구촌 수많은 이들이 고통에 절규하고, 인류의 실존적 위협이 나날이 긴박해지고 있다. 이 시점에, 전환의 파고를 헤쳐갈 길은 현실을 바라보는 세계 시민의 새로운 시선과 의식에 있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실존적 위기를 맞아 인류 공동의 목표가 필요하다. 지구 의식과 실천의 길을 적극적으로 열어가는 일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 오늘의 현대 사회는 관심과 생각, 지식의 지평이 그 어느 때보다 다양해졌다. 놀라운 과학기술이 존재한다. 그 지구적 추이와 성과를 진전시켜 나가되, 지속 가능한 미래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도전적 과업 앞에 새로운 지성과 지혜가 살아 숨 쉬는 세계. 그 세계는 나와 이웃, 사회와 세계, 지구와 우주를 전일적으로 성찰하는 지구 행성 의식이 살아 숨 쉴 때, 활로를 열어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반 부의장은 “우리 세상은 벼랑 끝에 서 있다. 지금 공동 대응에 나서지 않으면 하나의 지구를 공유하고 있는 우리는 모두 무대응으로 일관한 결과와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정치와 기업을 이끄는 리더들은 행동에 나서지 않고 있다. 기후 위기가 심각해지는 상황에서도 자신들의 이익에 반한다는 이유로 위기 대응 조치를 반대하기도 한다”면서 “이러한 교착 상태를 극복하는 것은 정의를 추구하는 것이 인간 본연의 모습임을 인식하는 데서 출발한다”는 생각을 전했다.
우리는 유엔 헌장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단결할 수 있다. 더 늦기 전에 기후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기득권에 맞서 싸울 수 있다. 평화를 위해 공정하게 분쟁을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반대로 인류의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해 수십 년에 걸쳐 힘겹게 얻은 지구사회의 약속을 저버릴 수 있다. 지구의 장기적인 미래보다 단기적인 이익에 우선하며 전범들이 현실정치라는 명목으로 끔찍한 행위를 저지르게 할 수 있다. 반 부의장은 그 선택이 우리에게 달렸음을 역설했다.

실존적 위기의 긴급성 이해, 관리·해결하려는 용기와 결단 ‘장기적 관점의 리더십’ 촉구
이어서 보코바 위원장의 사회로 ‘글로벌 위기와 새로운 정치’라는 주제 아래 대담을 펼쳤다. 디 엘더스의 로빈슨 전 의장과 반 부의장이 대담자로 나섰다. 보코바 위원장은 “실존적 위기에 직면한 지금, 글로벌 리더십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그러나 유엔을 포함한 글로벌 거버넌스 시스템이 흔들리고 있다”면서 글로벌 거버넌스 위기 극복을 위한 논의로 대담을 시작했다.
두 대담자는 현재 유엔을 비롯한 다자기구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진단하면서도 다자주의가 실존적 위기를 넘어설 해결책이라고 강조했다. 그들은 “다자주의의 본질은 포용·협력·연대다. 우리가 모두 지구 공동체의 일부임을 인식할 것을 요구한다. 국가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인류 공동의 이익을 위한 평화 협력의 방향으로 글로벌 거버넌스를 개혁해야 한다”라고 방향성을 제시했다.
이를 위해 디 엘더스는 장기적 관점의 리더십(Long-view Leadership)을 핵심 의제로 삼았다. 지난 2월에는 “실존적 위협은 급변하는 기후 문제, 수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가고 몇조 달러의 손실을 초래하는 팬데믹, 핵무기 사용이 공개적으로 거론되는 전쟁이 전부가 아니다. 인공지능과 관련된 새로운 위협은 얼마나 중대한지 가늠할 수 없다”는 시대 상황 진단과 함께 실존적 위기의 긴급성을 이해하고, 이를 관리·해결하려는 용기와 결단을 세계 지도자들에게 요청하는 장기적 관점의 리더십 촉구 공개서한을 공표했다.
반 부의장은 “우리가 직면한 실존적 위협은 어느 한 국가가 해결할 수 없다. 그런데 기후 문제에 큰 책임이 있는 선진국조차도 자국 우선주의 의제를 추구한다. 10여 년이라는 공을 들여 합의한 파리기후협약 체결 이후의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정치 지도자들이 평화로운 지구를 미래 세대에게 물려주기 위해 약속을 이행해야 한다. 단기적인 정치 주기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 세대 모두를 위한 정치를 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로빈슨 전 의장은 이에 동의하며 지난 11월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열린 제29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9)에 디 엘더스 대표로 참석한 경험을 들려줬다. 그는 “COP29에서 합의된 선진국의 기후 분담금은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었으나, 국가 간 합의를 이끌어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이를 바탕으로 의제를 좀 더 진전시켜 나갈 수 있다. 다만, 너무 느리다. 기후와 자연은 우리에게 긴급하게 행동하라고 요청하고 있다. 연대를 통해 시급히 문제 해결에 나서야 한다”라고 말했다.
“시민사회는 세상을 발전적인 방향으로 변화시킬 힘이 있다”
보코바 위원장은 “그런 의미에서 시민사회의 역할이 중요하다. 그러나 시민사회는 글로벌 거버넌스의 주변부로 밀려나 있는 것 같다”면서 시민사회의 역할 강화 방안에 관한 질문을 이어갔다.
반 부의장은 “미래 세대가 기후 대응을 촉구하면서 거리로 나선 기후 운동이 탈화석연료 전환 움직임을 촉발한 것처럼 도전적이고 용기 있는 시민사회는 세상을 발전적인 방향으로 변화시킬 힘이 있다. 혁신적이고 실효성 있는 해결책이 전통적인 기득권 밖에서 나올 수 있기 때문에 지도자, 정책가는 시민사회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라고 말했다.
로빈슨 전 의장은 “만델라가 우리에게 부여한 임무 중 하나가 ‘희망’이다. 디 엘더스는 지혜와 경험을 기반으로 인류 공동의 미래에 희망을 만들어 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우리는 모든 답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최전선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배운다. 세대 간 대화를 통해 지식을 공유하고, 공동의 이해를 도모할 방법을 모색한다. 그 과정에 미래 세대가 함께하는 게 중요하다. 그들이 오늘 내려진 결정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겸손’ 역시 만델라의 유산이다. 세계 지도자들에게도 겸손이 필요하다”라는 생각을 전하면서 지난 9월 미국 뉴욕에서 미래 세대와 연대해 발표한 공동 선언문 내용을 소개했다.
이 선언문에는 “우리는 단기 목표를 넘어 생각하고, 모두에게 이로운 미래를 위해 행동하는 지도자가 필요하다. 법치주의와 사법부의 독립성을 존중하고, 고립과 차별을 없애기 위한 사회적 유대를 강화하는 의제를 지지하는 지도자가 필요하다”라는 내용이 담겼다.

“지구상 모든 존재의 상호 연결성 이해를 돕는 교육 시스템 개발해야”
대담은 미래 세대와 새로운 정치에 대한 논의로 끝을 맺었다. 보코바 위원장은 “미래 세대의 역량을 강화하고, 평화·인권·포용·정의와 같은 보편적 가치와 모든 생명에 대한 존중을 위한 이해와 공감을 키우는 세계 시민교육 공간을 조성하는 것이 우리의 윤리적 의무”라는 생각을 밝히면서 “글로벌 정치의 패러다임 변화를 촉진하기 위해 교육은 어떻게 재구성돼야 할까”라고 질문했다.
반 부의장은 보코바 위원장의 생각에 공감하면서 “교육은 인류 발전을 위한 중요한 무기다. 교육은 지속가능발전목표(SDGs)의 핵심이며 성별·인종·종교를 이유로 차별받거나 소외된 사람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중요한 수단”이라는 말을 덧붙인 후, “지구상 모든 존재의 상호 연결성 이해를 돕는 교육 시스템을 개발해야 한다”라고 답변했다.
로빈슨 전 의장은 “최근 몇 년간, 소셜 미디어 플랫폼과 알고리즘이 가짜 뉴스와 잘못된 정보를 퍼뜨려 분열을 조장하고 있다. 여성 혐오를 부추기기도 한다. 이것은 국제 사회가 지난 수십 년간 힘들게 얻은 성과를 후퇴시키기도 한다”면서 디지털 리터러시 교육의 필요성과 함께 교육의 보편성에 집중할 것을 요청했다. 그는 “탈레반에 의해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녀들이 다시 교육받지 못하게 됐다. 가자, 레바논, 우크라이나, 예멘 그리고 전 세계 많은 분쟁 지역에서 학교가 군사 공격의 대상이 됐다. 교육은 보편적 권리다. 모든 국가의 지도자들이 시급한 우선 과제로 다뤄야 한다”라고 말했다.
미원평화상 시상식은 미원이 노랫말을 쓴 가곡 ‘목련화’를 함께 감상하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이 곡은 고난을 헤치고 새 시대를 열어가는 선구적 삶으로 더 나은 미래를 함께 일궈가자는 열정과 염원을 담고 있다. 참석자들은 노랫말의 의미를 함께 되새겼다.
글 오은경 oek8524@khu.ac.kr
사진 이춘한·정병성 communication@khu.ac.kr
ⓒ 경희대학교 커뮤니케이션센터 communication@kh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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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평화의 한반도 문학 경계를 넘는 상상력 오태호 지음 | 140×204mm 280쪽 | 무선 | 20,000원 2026년 8월 15일 발행 | ISBN 978-89-8222-828-5 (03810) ▣ 출판사 리뷰 남북한 문학을 동시에 조망한 최초의 한반도 문학 비평집 문학이라는 거울로, 분단을 넘어 사랑과 평화를 상상하다 김훈, 김연수, 장강명부터 북한의 백남룡, 『파친코』의 이민진까지 문학으로 남북의 현실과 욕망, 미래를 다원적으로 읽어내다 분단 이후 80여 년 동안 남과 북은 서로 다른 체제 속에서 살아왔다. 두 사회의 문학 역시 각자의 길을 걸어왔다. 그러나 문학은 서로 다른 현실을 비추는 동시에, 그 차이 너머에 존재하는 인간의 욕망과 감정, 삶을 발견하게 하는 매개이기도 하다. 이 책은 2000년대 이후의 남한 문학과 북한 문학을 함께 다루는 한반도 문학 비평집이다. 저자는 등단 이후 남한 소설에 대한 현장비평을 지속하는 한편, 2000년대 초반부터 『조선문학』을 중심으로 북한 문학을 연구해 왔다. 남북한 문학을 각각 다루던 기존 연구와 달리 이 책에서는 두 문학을 동일한 비평의 장에 두고 체제에 따른 상상력의 차이와 공통점을 조망한다. 또한 남한 문학에서는 분단의 모순과 북한을 둘러싼 상상력을, 북한 문학에서는 사회주의 현실과 인민의 구체적 삶을 다룬 작품들을 조명함으로써 분단이라는 경계가 문학 속에서 어떻게 재구성되는지 보여준다. ◼ 분단의 과거에서 통일 이후의 미래까지, 문학으로 읽는 한반도 1부는 남한 소설을 통해 분단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탐색한다. 김훈의 「명태와 고래」는 분단 시대의 그늘 속에서 살아간 월남민의 삶을 그리고, 김연수의 『밤은 노래한다』는 1930년대 간도 항일운동을 배경으로 청춘의 사랑과 죽음을, 노희준의 『킬러리스트』는 전생의 기억을 통해 항일무장투쟁을 호출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분단 이전의 역사를 다시 불러오는 이 작품들은 오늘의 한반도를 이해하기 위해 과거를 어떻게 소환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어 이현석의 「부태복」, 윤고은의 「부루마불에 평양이 있다면」, 이승민의 「연분희 애정사」 등은 탈북민의 체험, 남한 소설에 등장하는 북한 도시와 연애담을 통해 북한의 이미지가 변화하는 양상을 포착한다. 나아가 이응준의 『국가의 사생활』, 장강명의 『우리의 소원은 전쟁』을 통해 북한 체제 붕괴 이후의 디스토피아를 보여주고, 조해일의 「통일절 소묘」와 「통일절 소묘 2」를 통해 통일을 상상하는 서로 다른 시선을 비교하며, 김태용의 「옥미의 여름」과 박초이의 「강제퇴거명령서―2039년 평성」을 통해 기억·정체성·주거 문제 등 통일 이후 한반도를 상상한다. ◼ 북한 문학에 나타난 사회주의 현실과 인민의 삶 2부는 북한 문학을 대상으로 북한 사회의 현실과 문학적 상상력을 살펴본다. 백남룡의 『벗』을 통해 이혼 위기의 가정을 매개로 한 사회주의 일상을 조명하고, 렴예성의 「사랑하노라」, 리명선의 「보답」, 리철의 「더 높이 더 빨리」, 곽금철의 「선보는 날」 등을 통해 세계 일류를 지향하는 욕망, 사랑과 연정, 과학기술과 결혼 등 북한 주민들의 구체적인 일상 감정을 담아낸다. 또한 김하늘의 「들꽃의 서정」, 서청송의 「기폭에 빛나는 별」, 주설웅의 「소나무」, 김동호의 「밝은 빛」, 송혜경의 「인재」 등을 분석하며 북한의 ‘주체사실주의’와 ‘수령형상문학’이 변모하는 양상을 살펴본다. 지도자의 인민 사랑, 세계적 기술과 상품에 대한 욕망, 과학기술 발전에 대한 관심 등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이 작품들을, 저자는 단순한 체제 선전물로 치부하지 않고 그것이 생산·소비되는 사회적 현실과 그 안에 숨겨진 인간적 욕망까지 깊이 있게 읽어낸다. ◼ 한반도 문제의 외연을 확장하는 시선 3부는 남북한 문학을 직접 비교하거나 한반도 문제의 외연을 확장하는 작품들을 다룬다. 남북한 소설에 나타난 사랑과 가족의 풍경을 비교하고, ‘뿌리’ 개념(최종하 「깊은 뿌리」와 김숨 「뿌리 이야기」), 부자 관계와 혈연(홍남수 「세대의 임무」와 정용준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을 대조하며 체제에 따른 욕망과 감정의 차이를 분석한다. 그런가 하면 반디의 『고발』을 통해 북한 사회의 억압적 현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요나스 요나손의 『핵을 들고 도망친 101세 노인』과 이민진의 『파친코』 등 외부의 시선으로 한반도 문제를 조망할 때 새롭게 드러나는 풍경을 탐색한다. ◼ 다원적 상상력과 한반도의 평화 남북한 문학을 함께 읽는 것은 서로 다른 현실을 인정하면서 차이 너머의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는 일이다. 이 책은 정치적 통일이라는 최종 목표에 앞서, 평화가 지속될 수 있는 조건과 서로를 이해하는 관계 형성을 문학적 상상력으로 타진한다. 이는 ‘하나의 민족, 두 개의 국가’라는 상상에서부터 ‘두 개의 민족, 여러 개의 지역’이라는 상상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정답으로 수렴되지 않는 다원적 사유를 향한다. 문학은 눈에 보이는 현실 재현을 넘어, 아직 존재하지 않는 삶과 관계를 그리게 해준다. 서로 다른 체제 속 인물들이 나누는 사랑, 욕망, 두려움을 읽는 일은 서로를 추상적인 ‘남’과 ‘북’이 아닌 구체적인 ‘인간’으로 마주하게 한다. 남북 관계가 다시 단절과 대립으로 치닫는 지금, 서로의 문학을 읽는 행위는 단순한 문화 교류를 넘어 우리가 선택해야 할 미래에 대한 응답이 될 것이다. “문학은 상상력을 통해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다. 상상력은 눈에 보이는 것을 넘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가시화하는 인간 고유의 능력이다. 분단 극복과 민족 통일을 지향하며 한반도의 평화 체제를 모색하는 자유로운 상상력이 일방적인 체제와 이념에 가로막히지 않도록, 남북의 이상과 욕망이 상충되더라도 지속적인 교류와 협력을 통해 더 나은 관계를 구축해 나가는 것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하다.” -머리말 중에서 ▣ 차례 머리말 • 5 1부 과거와 미래를 현재화하는 응시 - 남한 작품론 10편 1. 과거의 응시 - 분단 시대의 그늘, ‘월남민 어부’의 생멸 - 김훈의 「명태와 고래」(2022)론 • 25 - 청춘의 사랑과 죽음으로 그려낸 1930년대 간도 항일운동의 음화 - 김연수의 『밤은 노래한다』(2008)론 • 33 - 전생 판타지의 기억으로 소환된 1930년대 항일무장투쟁 - 노희준의 『킬러리스트』(2006)론 • 45 2. 과거와 현재의 대화 - 코로나 시대의 징후적 상상력, 탈북 의사의 체험적 육감 – 이현석의 「부태복」(2018)론 • 57 - 평양과 개성이 남한 소설에 소환되는 방식 - 윤고은의 「부루마불에 평양이 있다면」(2019)론 • 65 - 반전 서사로 상상하는 북한 연애담의 양면적 진실 – 이승민의 「연분희 애정사」(2018)론 • 72 3. 미래의 예찰 - ‘북한 체제의 붕괴’ 이후 한반도의 암울한 미래를 상상하다 - 이응준의 『국가의 사생활』(2009)과 장강명의 『우리의 소원은 전쟁』(2016)론 • 83 - ‘통일절’을 상상하는 두 가지 방식 - 조해일의 「통일절 소묘」(1971)와 「통일절 소묘2」(2017)론 • 94 - ‘사진 한 장’으로 확인하는 과거 이미지와 현재적 실존 사이의 자기동일성 탐색 - 김태용의 「옥미의 여름」(2018)론 • 103 - 주거 문제를 둘러싼 디스토피아적 통일 한반도의 미래상 - 박초이의 「강제퇴거명령서-2039년 평성」(2019)론 • 112 2부 ‘사회주의 현실 주제’의 생동감과 ‘수령형상화’의 현재성 사이 – 북한 작품론 10편 1. ‘사회주의 현실 주제’의 생동감 - 이혼 위기 가정을 매개로 형상화한 사회주의 사회의 진솔한 내면 풍경 - 백남룡의 『벗』(1988)론 • 125 - 세계 일류 지향과 연정의 감각화 – 렴예성의 「사랑하노라」(2018)론 • 135 - 세계 일등주의의 표방과 북한문학의 생동감 - 리명선의 단막희곡 「보답」(2018)론 • 144 - 지구 밖 우주비행선에서의 음식물 제조 실험 성공담 - 리철의 과학환상단편소설 「더 높이 더 빨리」(2020)론 • 152 - ‘신상 구두와 신랑감의 첫선’을 보이는 ‘선보는 날’의 중의성 – 곽금철의 「선보는 날」(2020)론 • 161 2. ‘수령형상화’의 현재성 - ‘탈북민 서사’를 활용한 지도자의 광폭정치와 인민 사랑 - 김하늘의 「들꽃의 서정」(2014)론 • 173 - 체육인 식료품 제조에서 드러나는 세계화의 욕망 – 서청송의 「기폭에 빛나는 별」(2019)론 • 182 - 국내산 가방 증산을 통한 북한식 미래관과 후대관 강조 - 주설웅의 「소나무」(2019)론 • 192 - 세계적 기술의 국내 도입을 통한 인민 사랑의 실현 - 김동호의 「밝은 빛」(2019)론 • 201 - 청년 과학자의 연구 신념에 대한 지도자의 배려와 믿음 – 송혜경의 「인재」(2020)론 • 209 3부 한반도 문제의 외연 확장 - 남북한 문학 비교 및 탈한반도 작품론 6편 1. ‘사랑, 뿌리, 혈연’ 소재의 한반도식 이중주 - 한반도 문학에 드러난 사랑의 이중주 - ‘헌신성의 강조와 일탈의 욕망’ 사이 • 223 - 한반도에서의 서로 다른 뿌리 이야기 - 최종하의 「깊은 뿌리」(2012)와 김숨의 「뿌리 이야기」(2014)론 • 234 - ‘부자 관계’의 동일성과 차이 - 홍남수의 「세대의 임무」(2015)와 정용준의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2015)론 • 242 2. ‘북한 문제’를 활용한 ‘탈북 문학’의 외연 - 북한 사회의 억압적 체제와 통제된 현실에 대한 비판 - 반디의 『고발』(2017)론 • 255 - ‘북핵’을 풍자의 소재로 삼은 스웨덴의 베스트셀러 소설 - 요나스 요나손의 『핵을 들고 도망친 101세 노인』(2019)론 • 264 - 역사의 뒤안길에서 확인하는 개인과 가족의 생명력 – 이민진의 『파친코』(2017)론 • 271 ▣ 지은이 오태호 1970년 서울 출생.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200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문학평론(“불연속적 서사, 중첩의 울림”)으로 등단했다. 2004년 “황석영 소설의 근대성과 탈근대성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성신여대 전임연구원과 계간 『시인시각』, 웹진 『문화다』 편집위원을 역임했다. 2012년 ‘젊은평론가상(한국문학평론가협회)’과 2024년 ‘우수논문상(한국문예창작학회)’을 수상했으며, 평론집으로 『오래된 서사』, 『여백의 시학』, 『환상통을 앓다』, 『허공의 지도』, 『공명하는 마음들』, 『풍경의 그림자들』 등을 출간했다. 편저로 『동백꽃』, 『황석영』, 『이선희 소설 선집』, 『개마고원』, 『오영수 작품집』, 『조용만 작품집』, 『구상 시선』, 『정공채 시선』, 『계용묵 수필선집』, 『김기진 평론선집』, 『한효 평론선집』, 『북녘 마을의 사람 사는 풍경』, 『폐허에서 살아남기』 등이 있으며, 연구서로 『문학으로 읽는 북한』과 『한반도의 평화문학을 상상하다』, 『인공지능과 문예 창작』을 상재했다. 현재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부교수로 재직 중이다. ▣ 본문 중에서 『밤은 노래한다』는 일제 강점기의 청년들이 낭만적인 사랑과 꿈을 이어가기 어려운 시대적 현실을 포착한다. 그리고 그 엄혹한 고난 앞에서 펼쳐진 치열한 고투를 ‘밤의 노래’로 상징화하여 형상화한다. 1930년대처럼 지금 이 시간에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폭력과 전쟁으로 인해 현실적 고난이 이어지는 한 ‘김연수식 밤의 노래’는 계속 이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44쪽 ‘부루마불적 상상력’이란 모든 땅을 투자 개념으로 환원하여 자본의 논리로 영토를 확장하는 재산 증식의 상상력을 보여준다. 북한에도 자본주의적 ‘장마당’이 열리는 현실에 입각해 본다면 북한의 주택 역시 투자의 대상으로 호출될 수도 있을 것이다. 윤고은의 「부루마불에 평양이 있다면」은 이렇듯 북한을 매력적인 투자 공간으로 사유하는 남한의 2010년대식 욕망을 보여준다. ―71쪽 북한 텍스트에도 청춘 남녀의 연애담이 존재한다. 하지만 남한 텍스트에 익숙하게 드러나듯 ‘금기와 위반의 충동’이 아니라, 북한식 연애담은 개인의 사적 욕망에 앞서는 사회의 공적 담론의 성취가 핵심이다. 남대현의 『청춘송가』(1987)나 백남룡의 『벗』(1988) 등에서 드러나듯 북한의 청춘 남녀들은 다양한 내적 갈등을 내비치지만, 결과적으로 사적 욕망을 극복하여 성실하고 헌신적인 공산주의적 인간형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79쪽 누군가에게는 문학 작품 속 한반도의 평화통일이 절망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허구적 텍스트 속에서의 가상 통일이 늘 낭만적 미래를 현재화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통일에 대한 상상의 물적 토대가 근거 없는 사상누각이 아니라 남북한의 구체적 현실을 기반으로 한다면 문제는 자못 더욱 심각해질 수도 있다. 이응준의 『국가의 사생활』(2009)과 장강명의 『우리의 소원은 전쟁』(2016)이 ‘뜨거운 감자’인 이유는 한반도의 분단 체제를 직시하면서 암울한 미래를 상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83쪽 백남룡은 김정은 시대에 이르러 김정은의 ‘불멸의 여정’을 다룬 장편소설 『부흥』(2020)에 이르기까지 40년 넘게 지속적으로 북한 문학의 대표적 작가로서 그 명망을 이어오고 있다. 1990년대 이래로 ‘수령형상문학’ 중심의 장편소설을 창작하고 있다는 점에서 백남룡은 북한 사회주의 체제가 요구하는 ‘주체문학’의 전범적인 작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백남룡 문학의 세계성’은 김일성 가계의 위대성을 찬양하는 ‘불멸의 역사’와 ‘불멸의 향도’, ‘불멸의 여정’ 등의 장편소설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초기 단편소설과 중편소설에서 주목했던 세대론적 갈등을 통해 제기되는 노동자 문제, 교육 문제, 가정과 사회의 불화 가능성 등에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134쪽 리철의 단편소설 「더 높이 더 빨리」(『조선문학』, 2020. 5)는 북한 사회의 미래 지향을 보여주는 북한의 과학환상단편소설이다. 북한에서 ‘과학환상문학’은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전되고 현재에는 실현될 수 없는 최첨단 기술수단들이 련이어 개발될 미래의 생활을 묘사하는 특수한 문학”(황정상)으로 정의되면서 ‘미래의 생활’을 선제적으로 상상하는 텍스트를 말한다. 따라서 리철의 텍스트는 우회적으로나마 코로나 시기 봉쇄 정책으로 일관했던 북한 사회의 일단을 ‘과학환상’의 이름으로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152쪽 최근 북한 문학에서 강조되는 키워드 중의 하나는 세계화 시대의 욕망을 보여주는 ‘세계 일등의 지향’이다. 김정은 시대에 들어와 국내 1등을 넘어 세계와 어깨를 나란히 하거나 세계 1등을 거머쥐는 노력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서청송의 단편소설 「기폭에 빛나는 별」(『조선문학』, 2019. 1)은 1999년 세계육상선수권대회 여자마라톤경기 우승자인 정성옥 선수의 이야기와 2015년 동아시아경기대회 여자축구대회 우승 이야기가 나오면서 고난의 행군 시기 이래로 체육인들에게 영양 식료품을 제대로 공급하지 못하던 안타까운 북한 사회의 현실을 그린 작품이다. ―182쪽 남한 문학은 질문하고 탐색한다. 반면에 북한 문학은 답변하고 가르친다. 남한 문학은 뿌리 뽑힌 현대인의 ‘존재의 뿌리’를 응시하며 인생을 성찰한다. 반면에 북한 문학은 모든 존재론적 질문들에 대한 답변을 ‘김일성=김정일=김정은’의 등식 속에 ‘김일성 수령의 가계’라는 체제의 뿌리로 환원한다. 그러므로 남한 문학은 존재의 뿌리에 대해 자유로운 상상력을 발산하고, 북한 문학은 체제의 뿌리로 문학적 상상력을 경직되게 수렴한다. ‘심근성 뿌리 같은 남한 소설’과 ‘천근성 뿌리 같은 북한 소설’은 존재태가 서로 다른 문학적 뿌리의 두 가지 양상을 보여준다. ―2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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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의 통일성을 찾아서 집-궁전 르코르뷔지에 지음, 이관석 옮김 | 152×225 312쪽 | 무선 | 24,000원 2026년 7월 14일 | ISBN 978-89-8222-839-1 (03540) ▣ 책 소개 근대건축을 선도한 20세기 최고의 건축가 르코르뷔지에(Le Corbusier, 1887∼1965)가 1928년에 발표한 선언적 저서 《집-궁전: 건축의 통일성을 찾아서(Une Maison―Un Palais: À la recherche d'une unité architecturale)》가 국내 최초로 완역 출간되었다. 번역을 맡은 이관석 경희대학교 건축학과 교수는 저서 《르코르뷔지에 건축의 자연광과 지속가능성》 등으로 대한민국학술원 우수학술도서에 세 차례 선정되는 등 다양한 저술 활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대한건축학회 특별상을 수상한, 국내 르코르뷔지에 연구의 대표적 학자다. 르코르뷔지에가 이 책을 쓴 배경에는 1927년 제네바 국제연맹 청사 국제공모전이 있다. 건축 예술의 쇄신을 보여준 르코르뷔지에의 계획안은 377개 응모작 중 1등으로 추천되지만, 그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던 보수 아카데미의 조직적 음모에 밀려 공동 당선작으로 격하된다. 르코르뷔지에는 강연 형식을 빌린 이 책을 통해 국제적 논쟁이 된 야합의 경위를 낱낱이 밝히고, 자신의 작업에 담긴 건축적 의미와 가치를 당당히 증명한다. 흑백 사진과 건축 도면, 스케치와 드로잉, 신문 기사와 청원서 등을 함께 수록한 이 책은 르코르뷔지에의 건축적 사유와 실천이 담긴 중요한 자료집이기도 하다. ▣ 출판사 리뷰 근대건축을 선도한 르코르뷔지에의 감춰진 명저, 국내 최초 완역 보수 아카데미의 음모에 맞선 르코르뷔지에의 가장 뜨거운 변론 ◼ 건축 기득권의 허영을 깨부순 선언, “집은 궁전이고, 궁전은 집이다” 이 책의 제목 ‘집-궁전’을 처음 접하면 누구나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평범한 개인이 몸을 누이는 소박한 공간과 절대 권력이 누리는 화려한 공간을 나란히 연결한 저자의 의도가 쉽게 잡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도발적인 제목이야말로 르코르뷔지에의 핵심 건축 철학을 압축하고 있다. 이 책의 원제 Une Maison-Un Palais를 직역하면 ‘한 채의 집-하나의 궁전’ 정도로 옮길 수 있다. 이를 더 자연스럽게 풀어 보면, ‘집이자 궁전’, ‘집 그러나 궁전 같은 곳’ 정도가 된다. 르코르뷔지에에게 집은 궁전과 다른 게 아니었다. 집과 궁전 모두 정신과 마음이 빚어낸 하나의 종합적 산물이며, 역사를 흉내 내거나 유행을 좇지 않고 직관과 이성이 함께 작동해 완성된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같다고 본 것이다. 최대의 경제성과 최대의 강도를 추구한다는 점에서도 집은 곧 궁전이 될 수 있었다. 르코르뷔지에가 말하는 ‘기념비성’ 역시 규모나 재료의 비용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형태들이 조화로운 법칙 속에 배열되는 데서 비롯된다. 그는 전통적·관습적 건축만을 고수하는 보수 아카데미가 만들어낸 건축을 천박한 허영의 산물로 간주하며, 그것은 기계 문명의 시대에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다고 일갈한다. 책의 부제 ‘건축의 통일성을 찾아서’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프랑스어 ‘palais’는 궁전뿐 아니라 국가기관의 청사를 뜻하기도 한다. 르코르뷔지에는 국제연맹 청사를 소수 권력자를 위한 권위의 공간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열린 ‘집’으로 새롭게 제안했다. 진정한 고귀함을 상징하는 궁전의 정신을 세계인을 위한 집에 담아내겠다는 르코르뷔지에의 의도가 집과 궁전이란 두 단어를 같은 무게로 나란히 세운 제목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집은 하나의 궁전이다. … 궁전은 하나의 집이다. 나에게 남은 과제는 그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 우리는 집을 궁전으로 만들 수 있다. 그리고 통일성의 원리라는 절박함 속에서, 궁전은 집이 될 것이다.” ―본문 중에서 ◼ 새로운 건축을 향한 도전, “건축은 시대정신의 산물이다” 르코르뷔지에는 이 책에서 공모전 심사 과정의 불투명성과 시대에 뒤떨어진 절충주의 건축을 우대한 부당함을 지적하는 한편, 새로운 국제 질서를 상징하는 건물이라면 마땅히 현대의 기술과 합리성, 기능성과 위생, 표준화를 반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정 국가의 전통 양식이 아닌 보편적·국제적 건축, 그것이 르코르뷔지에가 국제연맹 청사에 요구한 시대정신이었다. 당시 르코르뷔지에는 슈투트가르트의 바이센호프 시범주택단지에 주택을 지으면서 필로티, 자유로운 평면, 자유로운 입면, 수평 띠창, 옥상정원으로 요약되는 ‘새로운 건축의 다섯 가지 요점’을 발표하며 건축가로서 성숙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이 원칙들은 국제연맹 청사 계획안에도 그대로 적용되었고, 그는 아카데미의 형식 대신 동선·음향·시야·조명·냉난방 등 각 요소를 개별적으로 분석해 하나로 통합하는 방식을 취했다. 르코르뷔지에는 “분류된 기둥, 필라스터, 박공, 처마 장식” 같은 아카데미의 형식들을 거짓된 것, 나아가 “위험한 시체”라 단언하며 이를 전면 거부했다. 그가 내세우는 미학, 즉 “선의 서정성, 구성의 시적 질서, 자연에 대한 헌신, 정직하고 대담한 건설, 빛의 충만한 확산, 기생적 요소의 차단, 배정된 예산을 정확히 지키는 근본적 성실성”은 양식의 문제가 아니라 윤리의 문제이며, 한 개인의 정신적 태도의 발현이었다. 이로써 르코르뷔지에는 ‘궁전’이라는 말이 상징하는 위선과 타락으로부터 건축을 책임과 정직함의 문제로 되돌려 놓았다. 결과적으로 르코르뷔지에는 국제연맹 청사에 이어 국제연합 본부, 유네스코 본부까지 세계 평화를 상징하는 건축 공모전에서 연이어 선정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 그는 자신의 건축적 신념, 즉 기능과 미학, 구조와 기술, 장소성과 문화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원칙을 선명하게 드러냈다. ◼ 르코르뷔지에의 사유와 실천을 담은 생생한 기록 이 책은 1928년 출간 이후 프랑스어와 일본어로만 소개되었을 뿐, 영역본조차 나오지 않은 채 오랫동안 묻혀 있었다. 보수적 건축 집단과 공모전 집행부의 치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내용 때문이었다. 이는 르코르뷔지에의 다른 저서 《대성당들이 희었을 때》가 프랑스 사회의 어두운 면을 비판한 장 때문에 영역본 출간이 9년이나 미뤄지고 일부 내용이 삭제되었던 사정과도 겹친다. 화려한 성취 이면에 가려진, 시대와 불화했던 르코르뷔지에의 또 다른 얼굴이 이 책에 담겨 있다. 이 책은 글로 설명된 원칙과 이미지로 증명된 실증이 나란히 놓이면서, 독자는 르코르뷔지에가 국제연맹 청사에서 구현하고자 했던 건축적 통일성을 문장과 도면 양쪽에서 동시에 체감하게 된다. 글과 사진, 도면, 스케치 등이 어우러진 이 구성 자체가 ‘집-궁전’이라는 제목이 말하는 조화의 정신을 책의 물성으로 구현하고 있는 셈이다. 부록에 실린 기사 내용과 르코르뷔지에와 경쟁했던 이들의 계획안, 청원서, 성명서 등은 당시 분위기와 상황 등을 매우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게 한다. 이관석 교수는 <옮긴이의 말>에서 “건축의 본질에 충실해야 하는 것은 오늘날에도 변함없는 과제”라고 강조하며, “깊은 이해와 비판적 사고가 약화되고, 본질보다 자극적인 형식과 스타일에 집중하며, 경험의 균질화로 다양성이 줄어드는 시각 위주”의 세태 속에서 건축의 고전(古典)인 이 책이 깊이 사유하는 훈련의 기준점이 되어줄 것이라고 역설했다. 건축의 본질과 시대정신을 치열하게 탐구하며 새로운 건축의 탄생을 선언한 르코르뷔지에의 사유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이 책은 그의 건축 철학을 가장 생생하게 만날 수 있는 귀중한 안내서이다. ▣ 차례 1부 명제 7 2부 설명 96 3부(부록) 아카데미의 목소리 190 저승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들 210 국제연맹의 길 215 옮긴이의 말 290 미주 300 ▣ 지은이 _ 르코르뷔지에(Le Corbusier) 본명은 샤를에두아르 잔느레이다. 1887년 스위스의 작은 도시 라쇼드퐁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미술학교를 다녔다. 1917년에 파리에 정착해 1965년에 78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크고 작은 건축·도시작품을 계획했으며, 이 가운데 100여 작품이 실현되었다. 2016년에 사부아 저택, 마르세유의 위니테 다비타시옹, 롱샹 성당, 라투레트 수도원을 포함한 그의 건축 작품 17개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건축을 향하여》, 《도시계획》, 《오늘날의 장식예술》, 《프레시지옹》, 《빛나는 도시》, 《모듈러》, 8권의 《작품전집》 등을 비롯해 5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 회화와 조각 작품도 많이 남겼으며, 《타임》에서 선정한 ‘20세기를 빛낸 100인’ 가운데 유일한 건축가다. ▣ 옮긴이 _ 이관석 경희대학교 건축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한양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삼성종합건설에 재직하며 리비아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건설현장을 경험했다. 이후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벨빌건축학교에서 투철한 근대건축 정신으로 무장한 앙리 시리아니가 리더인 교수들의 모임 그룹 우노(Groupe UNO)의 스튜디오에서 건축설계를 수학했고, 파리1-판테온소르본대학교 박사과정에서 근현대 건축사와 현대 뮤지엄 건축을 연구했다. 프랑스 정부공인 건축가이자 예술사학 박사로서 현재는 학생들과 건축을 교감하고 있다. 저서로 《빛을 따라 건축적 산책을 떠나다》, 《한국현대건축편력》, 《르코르뷔지에, 근대건축의 거장》, 《건축, 르코르뷔지에의 정의》, 《빛과 공간의 건축가 르코르뷔지에》, 《현대 뮤지엄 건축》, 《르코르뷔지에의 건축 수업》, 《뮤지엄, 공간의 탐구》, 《역사와 현대 건축의 만남》, 《르코르뷔지에 건축의 자연광과 지속가능성》, 《장식과 근대 건축》 등이 있으며, 역서로 《건축을 향하여》, 《프레시지옹》, 《오늘날의 장식예술》, 《느림의 건축을 위하여》, 《작은 집》, 《대성당들이 희었을 때》 등이 있다. ▣ 본문 중에서 이 건축의 순간은 더 이상 기계 이전 시대를 맹목적으로 답습하는 보수적 아카데미의 썩어가는, 시체 냄새 풍기는 생산물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건축은 시대정신의 산물이다. 건축은 세계를 지배하는 법칙에 따라 앞으로 나아간다. ―8쪽 집이 하나의 유형이라는 단언은 지금 이 혼란의 시대에 반드시 짚고 넘어갈 가치가 있다. 19세기와 20세기의 연속적이고 수많으며 빠르고 때로는 번개 같은 발견들이 사회의 기초를 뒤흔들고, 우리의 이성과 감수성을 교란시켰다. 그 결과, 죽은 것과 살아있는 것, 굳어진 공식과 가장 대담한 전망들이 뒤엉킨 불협화음의 결산이 우리 앞에 놓였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신이 우리에게 왔다. 그것은 우리의 현재 상황에 대한 자각과 과거에 대한 연구로부터 비롯됐다.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고, 새로운 사회와 새로운 인간이 출현했다는 것이다. ―46쪽 기계주의의 돌풍 아래, 지금까지 통용되어 온 모든 수단이 무너져 내리자, 더 이상 과거의 궁전은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됐다. 게다가 최근 수십 년간 아카데미들이 산출해 낸 궁전은, 궁전이라는 말의 의미를 끔찍하게 더럽혔다. 궁전은 더 이상 고귀함의 상징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로지 천박한 허영의 이미지에 지나지 않았다. 궁전은 어떤 건전한 정신, 어떤 순결한 영혼에게도 합당하지 않았다. 궁전은 이미 부패해 구더기들이 들끓는 썩은 스튜와 같았다. 기계주의 시대의 우리 인간의 위장은, 그렇게 부패 직전의 음식을 더는 소화할 수 없다. ―64쪽 예산은 낭비되고, 과시를 위해 돈은 창밖으로 던져졌다. 건축이라는 진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단지 하나의 유행, 형식적인 정신놀음, 한때 생명을 불어넣었던 정당한 활력과 더 이상 아무런 접점도 없는 서정적인 형상으로 전락했다. 그리고 여기 인간 정신의 가장 비열한 상태인 거짓, 허영, 과장이 드러난다. ―65쪽 우리는 과거로부터 힘을 얻었다. 왜냐하면 과거는 우리에게, 지속적인 명료함과 균형의 조건 속에서 집은 하나의 유형임을, 그 유형이 순수할 때 진정한 건축의 저장인 건축적 잠재력을 지니고 있으며, 궁전의 존엄에까지 이룰 수 있음을 증명해 주었기 때문이다. ―78쪽 집은 하나의 궁전이다. (…) 궁전은 하나의 집이다. 나에게 남은 과제는 그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내가 여러분께 말씀드릴 제네바의 궁전은 나라들의 집, 곧 국제 사회의 행정의 집이다. 그것은 하나의 유기체이며, 특정한 목적을 향한 기계다. 그것은 거주를 위한 기계다. ―88쪽 집은 궁전이다. 이것이 지금 진행 중인 논의다. 우리는 집을 궁전으로 만들 수 있다. 그리고 통일성의 원리라는 절박함 속에서, 궁전은 집이 될 것이다. 국제연맹 청사 건립을 위한 국제 설계공모전은 거대한 실험의 기회였다. ―90쪽 오늘날 우리 시대는 무엇보다도 빛을 필요로 한다. 이제 정주하는 존재가 된 우리는 빛이 필요하다. 새로운 시대, 새로운 과업의 문턱에서 우리는 우리 안에서나 주위에서나 분명히 볼 수 있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은 현대적인 행동 프로그램이며, 특히 국제연맹 프로그램 그자체다. ―112쪽 우리는 어떤 아카데미 공식도 쓰지 않았다. 분류된 기둥, 필라스터, 박공, 처마 장식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런 요소들은 모두 거짓이기 때문이다. 그 거짓을, 국제연맹 고등사무국과 이 건축 문제에 관여한 대사들은 건축의 살이라 부르지만, 나는 그것을 시체, 위험한 살이라 부른다. ―188쪽 선들의 서정성, 구성의 시적 질서, 자연에 대한 헌신적 행위, 건축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하게 품위 있는 자세로 맞서는 것, 정직하고 대담하게 건설하는 행위, 빛을 구석구석까지 퍼뜨리는 행위, 모든 기생적 요소의 길을 차단하는 행위.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정직한 사람의 가장 근본적인 성실성, 즉 배정된 예산에 정확히 맞는 비용으로 건물을 설계하는 것(세 배, 네 배가 아니라! 오, 조약과 법을 수호하는 국제연맹이여!)—이러한 미학은 아카데미즘의 표현이 아니다. 그것은 윤리의 표현이다. 그것은 한 개인의 정신적 상태의 표현이며, 개인적 태도의 발현이다. ―188쪽 이 공모전 사건의 초기부터 관여한 한 인물은 이렇게 말했다. “이 공모전은 처음부터 짜여 있었다. 아카데미가 실행자로 내정되어 있었으며, 공모전은 단지 허울이었다. 게다가 국가적 야망이 거칠게 표출되자, 정치적 이해를 충족시키려 네 건축가를 타협안으로 정한 것이다. 선택된 것은 공모안이 아니라, 특정 국가와 아카데미 건축가들이었다. (공모전이라는 희극은 337명의 참가자에게 2,000만 프랑 이상을 허비하게 했다!)” 세계 언론은 이 술책을 가리켜 “청사 스캔들”이라고 불렀다. ―219~2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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